함께 사는 세상/영화, 드라마, 연극 이야기

슬픔을 대물림하다, <선덕여왕>의 비담

강물이 흘러 2009. 11. 16. 23:28

[이계정의 심리학 T론]

 

슬픔을 대물림하다, <선덕여왕>의 비담      

 


   상담에서 종종 ‘핵심감정을 찾는다’ 표현을 쓴다.

   핵심감정이란 한 사람의 말과 행동, 사고와 정서를 지배하는 중심 감정으로 프로이트, 융 등이 사용했던 콤플렉스의 개념과 비슷하게 한국에서 이동식 박사가 만든 보다 한국적인 개념이다. 이것은 태아기부터 모체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에 임신 중 어머니의 정서가 매우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의 시대가 끝났다. 미실(고현정 분)은 내 마음을 참 혼란스럽게 했다. 여러 남자들을 농락하며 어떻게든 권력을 손에 쥐려고 바둥대는 그녀는 심리학자 융이 말하는 부정적 아니무스의 발현처럼 보여 탐탁지 않았으며 회가 거듭될수록 어떠한 불리한 상황에서도 자신감 있게 술수를 만들어내는 모습이 멋져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가끔 무너지는 모습은 안타까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한 웃음을 잃지 않으며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는 그녀가 얄밉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아들 앞에서 눈물을 삼키며 최후를 맞이한 미실.

   그녀가 삼킨 눈물을 굳이 핵심감정으로 말하자면 슬픔 정도가 아닐까. 화랑으로서 피 흘리며 지켜낸 신라에 대한 연모 진흥제의 불신으로 혹은 그녀의 지나친 욕심으로 짝사랑이 되었으며 사랑하기에 모든 것을 빼앗으려 했던 야무진 계획도 번번히 무너져 하나도 제대로 갖지 못한 채 물러서야만 했던 슬픔.

   아들마저 버린 미실은 적이 된 비담을 원망할 수도 그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설원랑에게 울먹이며 남긴 미안하다는 한마디가, 진심이 담긴 그녀의 최초의 발언 미실의 죽음을 더욱 슬프게 한다. 

 


 

   그런 미실의 아들로 태어난 비담(김남길 분)은 어떤가.

   실제 역사 속에서 비담의 난으로 잠깐 등장하는 그는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비극의 주인공으로 부각되었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태어났고 또 그 이유로 버림받은 그는 누구에게나 적이 되는 사실상 외톨이다.

   문노에게도 끝내 신임을 얻지 못했으며 그가 연모하는 덕만의 마음은 유신에게 있다. 화랑으로 인정받아 공주를 왕으로 추대하는 중요한 세력의 하나가 되지만 미실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끝내 겉돌게 된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증오하면서도 그녀를 죽이려는 음모 앞에선 한없이 약해지는 비담은 어디에도 진심을 말할 수 없는 외로운 사람이다.

   지난 49회에서 미실을 보호하기 위해 공주에게 거짓말을 하는 그의 표정은 슬픔을 삼키고 강한 모습을 지키려는 미실의 그것과 닮았다. 그나마 미실은 그녀를 끝까지 믿고 사랑했던 설원랑이 있어 마지막으로 진심을 드러낼 수 있었지만 비담은 그런 대상조차 없이 외롭게 최후를 맞게 되지 않을까 싶다.

    슬픔을 대물림한 그는 외로움을 더한 핵심감정을 지닌 채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재밌는 것은 화면에 나타나는 그의 표정늘 극과 극을 이룬다 것이다. 아이처럼 천진하게 웃는가 하면 급격히 심각해져 그야말로 어둠의 자식이 된다. 배우의 연기가 어설픈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비담의 표정 연기는 그의 외롭고 공허한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내게 1년 넘게 상담을 받고 1년 만에 만났던 한 학생이 생각난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기는커녕 가장 기본적인 안전도 제공받지 못했던 그녀는 늘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그녀는 종종 힘든 이야기를 하면서 깔깔거리며 웃었는데 그런 불일치가 처음엔 이상하게, 그리고 그녀를 안 이후로는 매우 슬프게 다가왔던 것 같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예전보다는 훨씬 진실된 웃음인 것 같아 한결 마음이 놓였다. 힘든 이야기를 하며 울 줄도 알고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환하게 웃을 줄도 아는 그녀가 참 예뻐 보였다.

 

    어머니 자신도 시원하게 토해내지 못한 감정을 그대로 대물림한 비담은 안타깝게도 결국 궁지에 몰려 어머니의 길을 따르게 될 것 같다.

    두 얼굴의 사나이 비담에게 연민을 느낀다면 나 또한 내 안에서 어떤 불일치를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모르는 그 어떤 감정을 그대로 대물림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만하다. 그렇다면 살풀이라도 해서 핵심감정을 녹여버리는 것 정신건강에 좋다. 

 

글 이계정(칼럼니스트, 심리상담전문가) | 사진 TVi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