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이 흘러 2010. 3. 15. 12:27

‘파스타’가 남긴 것

헤럴드경제 | 입력 2010.03.11

9일 종영한 MBC 월화극 '파스타'의 시청자 게시판은 거의 영결식장 분위기다. "죽어도 못보내" "이제 무슨 낙으로 살지" 등 많은 글들이 종영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서운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물론 열혈팬들의 글이 대다수겠지만 시청률이 20%를 넘어섰다면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작가와 연출자가 지녔던 제작의도와 생각들을 배우들이 얼마만큼 잘 담아내 시청자와 소통에 성공했는지를 살펴보면 관심의 해답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다.

10일 종방연에서 만난 '파스타'의 권석장PD는 "땀을 흘리는 사람의 진정성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힘들게 일하는 사람의 모습을 담기위해 대충 찍은 신이 별로 없었다. 첫번째 주에는 한 신에 무려 160개의 컷을 찍은 적도 있었다.


전쟁드라마가 전쟁신을 리얼하게 보여줘야 하듯 요리 드라마가 요리하는 모습을 허술하게 보여주어서는 안된다. 대충 찍고 싶은 유혹도 있었다고 하지만 제작진의 세밀한 감성을 농업적 근면성으로 밀어붙인 게 통했음이 증명된다.


'파스타'에 등장한 인삼파스타와 세가지 맛의 파스타는 실제로는 없는 음식인데도 요즘 이탈리아 식당을 찾는 손님중에는 인삼파스타와 세가지 맛 파스타를 찾는 사람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이탈리아 식당의 주방이라는 드라마 공간의 긴장성이 끝까지 유지될 수 있었다. 이는 드라마의 전체 분위기를 지배했다. 셰프 최현욱(이선균)이 "봉골레 하나, 안심 스테이크 둘~" 하며 주문서를 읽어나가며 주문이 쫙 밀려옴을 느끼는 순간 시청자들은 "과연 저 메뉴들을 제시간내에 다 만들어낼 수 있을까"하는 긴장감을 갖게 된다. 더구나 까다로운 셰프는 요리사가 만든 음식을 대충 통과시키지 않고 철저하게 검열한다.


'파스타'는 남녀 요리사간에 이뤄지는 로맨스조차도 직업드라마로서의 긴장감때문에 유지되는 측면이 강했다. 드라마평론가 신주진은 "유경과 현욱은 연애하는 동안에도 직업의 권력관계에서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면서 "이 점은 연애가 시작되면 재벌 2세 등의 직업적 속성을 뛰어넘는 기존의 트렌디물과 다른 지점이다"고 설명한다.


'막내 요리사' 유경(공효진)은 현욱과의 사적인 만남의 순감에도 애인이 셰프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셰프의 말이 떨어질 때마다 "녜 솁" 하며 셰프의 권위를 인정하고 뭔가 배우려고 한다. 애인이 인생의 멘토 같다. 이 점은 권석장PD가 "'파스타'는 요리사가 사랑을 하는 드라마다. 사랑하는 사람이 요리를 하는 게 아니었다"고 설명한 부분과 상통한다.


직업관계가 멜로구도를 지배하는 부분이 크다보니 제 3~4인 인물인 오세영(이하늬)과 김산(알렉스)의 멜로적 역할은 별로 없었다. 세영과 김산은 직업관계에서는 한 축을 형성하지만 로맨스에서는 긴장을 가져다주는 인물이 아니었다.

멜로를 형식적으로 보면 4각관계지만 유경과 현욱에게는 사랑의 장애 요인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 흔한 부모의 반대라든가, 출생의 비밀의 등장과 같은 사랑의 갈등 요인이 거의 없었다.


 

두사람의 권력 관계가 주는 안식과 긴장, 갈등만으로도 그들의 관계를 충분히 끌고갈 수 있었다. 직업적인 권력관계가 로맨스를 만들어주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이는 '파스타'가 직업드라마로서 어느정도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침체에 빠져있는 트렌디 멜로물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한 측면도 있다.


물론 종반에 접어들면서 그 권력이 현욱에서 유경에게로 조금씩 추이가 이동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 권력 이양은 유경이 실력으로 획득한 부분도 있고 현욱이 "이제는 믿을만해서" 자발적으로 넘겨준 부분도 있다. 이 점이 직업적 권력과 멜로가 잘 섞인 두 사람 관계의 변화요 성장이다.


'파스타'는 배우들의 연기와 연기 앙상블도 매우 좋았다. 권석장 PD는 "이선균-공효진의 연기는 이미 검증됐지만 둘의 조합을 반대한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더 고집을 부린 면도 있다. 결과적으로는 내가 생각한 이상의 효과가 나왔다"면서 "이선균에게서는 눈에 광기가 보여 현욱 캐릭터에 적합할 것 같았고, 공효진에게서는 변방에서 우짖는 새처럼 주류에서 약간 거리를 두고 있는 쓸쓸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권PD는 이어 "두 사람은 리허설에서는 계산하지 못했던 자연스러운 연기가 나올 때가 많았다. 가령, 공효진이 멜로 연기하다 얼굴이 빨개진다든가 하는 날 것의 느낌과 감정이 나올 때는 너무 좋아 살렸다"고 덧붙였다.

그러니까 제작진은 어느 정도에서 멈춰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두 사람이 더 앞서 나가 끌고간 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공효진의 반응이 재밌다. 공효진은 연기중 실재와 가짜가 구분이 잘 안될 정도였다는 질문에 대해 "아무리 연기라지만 남자한테 뽀뽀를 받으면 쑥스러울 수밖에 없다. 사방에는 스텝들로 둘러쌓인 상황에서 당황한 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뽀뽀까지만 마치면 끝이니까 이후에는 애드립성 동작이 있었다. 이 애드립 부분은 편집할 줄 알았는데 감독님이 방송에 내보내더라. 그런데 반응이 좋았다. 시청자들이 NG같지 않게 받아들여주었다. 무엇보다 호흡이 좋았기 때문에 그런 게 가능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까칠한 셰프인 현욱 캐릭터가 시청자의 호감을 끌어낸 것도 '파스타'의 성공 이유다. 현욱에 대해 이선균은 "어떤 톤으로 가야될지 그림이 잘 안잡혀 힘들었다. 편하지 않은 다중적 캐릭터였다"고 말했다.

 

공효진도 "처음에는 현욱과 눈을 마추치지 못할 정도로 어색했다. 4주까지는 매번 혼만 났다. 하지만 어느 순간 눈을 마주보며 피하지 않는 게 좋은 순간이 자연스럽게 다가왔다"고 말했다.

현욱은 일에 있어서 완벽주의자다. 호통을 치고 까칠하다. 그래서 이선균도 스스로 다양한 동작을 만들어 호통을 어울리게 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시청자가 볼때 "저런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누가 밑에서 일할까?"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현욱은 누구에게나 공정하다. 권력의 속성을 이용해 자기 이익을 채우지 않는다. 이 점이 겉으로는 권위적이고 독재자로 군림하려는 것 같으면서도 매력을 느끼게 하는 속성이다.

갈수록 생존하기 힘들어지는 직장 생태계에서는 현욱같은 팀장을 필요로 할지 모른다. 일에서는 철저하게 까칠하지만 사랑과 인간적인 면에서는 훈훈하고 항상 공정할 수 있는 리더 말이다.


라스페라 주방은 사회의 축소판이고 실제 사회는 이 식당 못지 않게 위계화, 권력화돼 있다고 보면 현욱 셰프는 충분히 현실적인 인물로서 충분히 공감을 이끌어낼만하다.

서병기 대중문화전문기자/wp@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