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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구차하게 변명할바엔 차라리 공직 포기

강물이 흘러 2010. 8. 30. 22:52

美 구차하게 변명할바엔 차라리 공직 포기

매일경제 | 입력 2010.08.30 

◆공직을 다시 본다 (中) 선진국은 뭔가 다르다◆

미국에서 공직은 모든 국민의 표본이다. 공무원에 대한 검증과 평가가 엄격하고 가혹할 수밖에 없다. 청문회를 거치지 않는 직급의 공직자를 채용할 때 '거짓말 탐지기'까지 동원되는 사례도 있다. 그렇기에 스스로 잘못이 있다고 판단하는 사람은 아예 '자리'를 탐내지도, 제의를 수용하지도 않는다.


◆ 자격 미달자는 공직 엄두도 못내

 

2009년 1월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상무장관으로 내정됐던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 주지사(61)는 청문회를 하기도 전에 상무장관직을 포기했다. 리처드슨 주지사는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유엔 대사와 에너지장관 등을 지냈고 연방 하원의원을 7차례 연임하는 등 히스패닉계로선 미국 내에서 최고위직에 올랐던 인물. 그러나 리처드슨 주지사는 자신과 특정 업체의 유착 관계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자 그토록 갈망했던 연방정부 장관직을 포기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정치적 대부이자 행정부 의료보험 개혁을 진두지휘할 보건장관으로 내정했던 톰 대슐 전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도 청문회 전에 스스로 물러난 사례다. 과거 3년간 체납한 세금 10만달러를 뒤늦게 낸 사실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위장전입처럼 미국 청문회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신물 난 주제는 세금회피.


미국 공직자 검증 절차에 밝은 워싱턴 소식통은 "상원 청문회에 나와 '송구스럽다, 죄송하다'는 말을 남발할 정도로 스스로 잘못을 인정한다면 차라리 사전에 스스로 공직을 포기하는 게 순리라는 공감대가 미국 공직문화에 형성돼 있다"고 전했다.


◆ FBI까지 동원 철저 검증


미국에서 공직을 맡으려면 길고 긴 까발림을 당해야 한다. 임명 전 단계인 백악관과 FBI, 국세청 조사에서는 사돈에 팔촌까지, 이웃과 친구들에 대해서도 탐문조사를 벌인다. 상원 청문회에서는 후보자의 철학과 비전 등을 놓고 격론을 펼친다.

'대통령 임명직 내정자가 살아남기'란 책을 발간한 폴 라이트 뉴욕대 교수에 따르면 미국에서 대통령이 임명하는 자리는 3000개가량. 버락 오바마 정권인수위원회가 펴낸 책자에 따르면 이 중 상원인준 청문회를 거쳐야 하는 자리는 1141개.


청문회는 대통령 임기가 시작된 후 1년이 지난 시점에도 계속된다.

지난 3월 백악관은 "대통령 임기가 시작된 지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공직자 77명이 상원 인준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특히 "이 중 44명은 1개월 이상 인준을 기다리고 있다"고 늑장 인준을 비난했다. 야당의 시간끌기도 문제지만 그만큼 검증 절차가 철저하고 까다롭다는 얘기도 된다. 그 바람에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8년 재임기간에 휴회 중 임명 제도를 171차례 활용했고, 빌 클린턴 전 대통령도 재임 당시 139차례나 이 제도를 활용했다. 오바마 대통령도 올해 들어 두 번이나 이 제도를 활용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공직자) 검증 절차는 악몽"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전도유망한 후보자들이 복잡한 인사 검증 절차 때문에 공직 진출에 흥미를 잃고 있다"며 "(검증 절차가 시작되면) 18세 이후 살아온 모든 곳을 기억해야 하며 아는 모든 외국인의 이름을 제시해야 한다"고 투덜댈 정도였다.


◆ 현직도 여차하면 중도하차

뉴욕 흑인 빈민가 할렘에서 태어나 영향력 있는 정치인 자리에 오른 '할렘의 사자' 찰스 랭글. 투표 때마다 90% 득표율로 20선에 오른 미국의 대표적인 친한파 정치인이다. 요즘 랭글 의원이 13개 혐의로 미 의회 윤리위원회에 제소돼 정치적 운명의 기로에 섰다. △10년간 재산 신고 60만달러(한화 7억원 상당) 누락 △도미니카공화국에 있는 해변 빌라 대여료 수입에 대한 탈세 △기업체에서 비용을 후원받은 외유성 여행 두 차례 △자신의 이름을 딴 대학 건물을 위한 부적절한 모금활동 등 때문이다.


얼핏 10년간 연간 1억원도 채 되지 않는 돈의 변동은 놓칠 수도 있는 것이고 외유성 여행과 모금활동도 곰곰이 보면 넘어갈 수 있는 문제다. 사법적 처벌 가능성도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윤리적인 문제에 국한돼 있다.

그러나 미국 국민의 여론은 '나가라'다. 의회 윤리위는 20선 의원의 뒤를 캐는 이 일을 무려 2년 동안 해왔다. 아무리 손가락질 받을 짓을 해도 윤리위로만 넘어가면 되레 안도하는 우리 국회의원과는 거리가 멀다.


2007년 8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평가받아 온 앨버토 곤잘러스 법무장관도 결국 사임했다.  연방 검사 무더기 해임, 부시 행정부의 영장 없는 불법 감청 등과 관련해 당시 야당인 민주당에서 강한 사임 압력을 받아 온 그는 결정적으로 위증혐의가 더해졌다. 의회 조사 과정에서 수차례 말을 바꿨고 국가안보국(NSA)의 영장 없는 감청과 관련해서도 위증을 했다는 의혹을 받아 왔다.


◆ 대통령이 사전 야당 협조를 구한다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하원 연방의원을 지낸 김창준 전 의원은 "국회의원이나 공직자들에게 높은 윤리적 잣대를 요구하는 것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거의 유사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다만 두 나라 간 차이가 나는 것은 미국은 개인적인 비리나 위법 등은 청문회 이전에 모두 걸러진다는 것이다. 스스로 물러나거나 임명 전에 걸러진다는 것. 우리나라처럼 검증이 허술해 임명 이후 위법행위가 발견되는 사례는 드물다는 평가다.


김 전 의원은 "개인적인 문제는 이미 의회 상원을 오기 전에 걸러지므로 의회 청문회에서는 후보자의 철학과 색깔 등만을 따진다"고 전했다.

김 전 의원은 나아가 "미국에서는 중요한 인물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미리 야당에 협조를 구하고 야당도 대통령의 요구를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도 톰 대슐 첫 보건장관 지명자와 같은 탈세혐의가 발견돼 인준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오바마 대통령의 협조요청을 야당이 받아들인 사례였다.

그는 "공무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확립된 미국에서는 총리를 포함해 장관이 2명이나 한꺼번에 청문회 직후 사퇴하는 상황은 있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워싱턴 = 장광익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