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기다렸어 평창” 대한체육회 신입사원 김은진 영화 같은 스물아홉의 이력서
“그래 기다렸어 평창” 대한체육회 신입사원 김은진 영화 같은 스물아홉의 이력서
국민일보 | 입력 2011.07.07
지난 4월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 한 명이 은퇴했다. 4년 8개월 달았던 태극마크를 반납하는 일은 무척 간단했다. 은퇴 행사 같은 건 없었고, 동료들이 열어주려던 파티도 일정이 어긋나 미뤘다. 세계선수권대회 출전하고 돌아오는 길에 감독에게 이제 그만하겠다 말하고는 유니폼을 벗었다. 아이스하키 여자국가대표팀 공격수 김은진(29). 그의 국가대표 시절이 한 편의 영화라면 이런 엔딩은 너무 싱겁다. 시작은 정말 '영화'였다.
합숙훈련
고집 센 딸을 엄마가 말리는 건 불가능하다. 가끔 전교 1등도 할 만큼 공부를 썩 잘했던 여고생 김은진은 어느 날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에 진학하겠다고 선언했다. 영상을 다루는 게 그냥 좋았다고 한다. 선생님도 부모님도 노발대발했지만 그는 고집 센 딸이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에 다니며 단편영화를 대여섯 편 찍어봤고, 영화 '장화홍련' 촬영감독을 무작정 찾아가 기술스크립터(촬영 과정을 기록하는 일)를 했고, 졸업 후엔 영화사 싸이더스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살인의 추억' 집필을 도왔다.
우리나라 영화판은 아직 무명작가에게 충분한 보수를 줄 만큼 풍요롭지 않다. 주머니에 하루 차비 2000원 넣고 시나리오 쓰겠다며 돌아다니던 2005년 가을, 대한아이스하키협회의 여자국가대표팀 선수모집 공고가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핸드볼 여자국가대표팀을 소재로 한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은 2007년 만들어졌다. 김은진은 "아이스하키 선수모집 공고를 보고 '아, 저걸로 영화 만들면 되겠다' 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때 내가 만들고 싶었던 영화가 우생순 같은 거였다"고 말했다.
박현욱 당시 대표팀 감독을 또 무작정 찾아갔다. 선수들 이야기로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 훈련도 같이 해보겠다, 아이스하키 경기 보러 많이 다녔다, 나도 스케이트 타본 적 있다… (실제로 집 근처 빙상장의 아마추어 클럽팀에서 친구의 스케이트 장비를 빌려 운동했던 적이 있다. 아이스하키 하려는 여자가 없어서 여자는 회비가 무료이던 때였다).
이렇게 말하는 당돌함을 높이 샀는지, 키 168㎝ 체중 58㎏의 체격조건이 마음에 들었는지 박 감독은 취재를 허락했다. 몇 차례 훈련을 참관하고 아이스링크에서 같이 스케이트 탔을 무렵, 대표팀이 전북 전주로 합숙훈련 떠나는데 박 감독은 그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전주에서 보낸 3주. 취재를 하는 건지, 훈련을 하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감독은 독하게 운동을 시켰다. 존댓말하며 그를 '손님'처럼 대하던 선수들도 이제 거리낌 없이 '동료'로 여겼다. 무엇보다 그의 스케이팅 실력이 3주 동안 너무 늘어버렸다.
"감독님은 저를 선수로 만들 생각이 있었나 봐요. 여자 아이스하키는 늘 선수가 부족했거든요. 독한 훈련을 소화하고 나니까 저도 자신이 좀 생겼고…."
그렇게 작가인지 선수인지 알 듯 말 듯한 생활을 1년여 하고 난 2006년 12월. 국가대표 이야기로 영화 만들겠다며 아이스링크 찾았던 여자는 직접 국가대표가 됐다.
국가대표
국내 아이스하키 여자선수는 현재 117명. 21명은 국가대표이고 나머지는 중학생 11명과 초등학생 85명이다. 중·고교, 대학, 실업팀은 없다. 초등학생팀은 남녀 혼성이다. 중학생 선수들은 몇몇 클럽팀에서 뛴다.
태릉선수촌에서 여자 아이스하키 훈련시간은 늘 밤이었다. 남자 아이스하키, 피겨스케이팅, 쇼트트랙 선수들과 아이스링크 사용시간을 나누다보니 그렇게 됐다. 국가대표 김은진은 보통 저녁 8시인 훈련시간까지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또 무작정 찾아다녔다.
아이스하키팀이 있는 초등학교에 가서 운동 좀 하게 해달라고 부탁해 어린 학생들과 함께 스케이팅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노원청소년수련원에서 일주일에 두 번 인라인스케이트 강사로 일했고, 그런 일정도 없을 땐 혼자 체력훈련을 했다. 클럽팀은 여자대표팀보다도 늦은 밤 10시30분이나 11시부터 운동을 시작한다. 그들 틈에 끼어 훈련과 시합을 하다보면 새벽 3∼4시가 돼야 잠들 수 있다.
태극마크 달고 처음 출전한 경기는 2007년 1월 중국 창춘동계아시안게임. 중국 일본 북한 카자흐스탄 등이 출전했는데 모두 한국보다 한 수 위다.
"카자흐스탄 선수들 너무 무서웠어요. 보디체크 하는데 돌덩이랑 부딪치는 줄 알았죠. 일본은 키가 작지만 빨라요. 중국에 20대 0, 일본에 29대 0, 카자흐스탄에 14대 0, 북한에 5대 0으로 졌어요."
1999년 강원동계아시안게임에 처음 출전한 한국 여자대표팀은 이후 다섯 차례 아시안게임에서 1승도 거두지 못했다. 한국을 가볍게 이기는 아시아 국가들도 유럽과 미주 선수들에 비하면 한 수 아래다. 이렇게 실력차가 크다보니 세계선수권대회는 1부 리그인 '월드챔피언십'과 '디비전 1∼4'로 그룹을 나눠 진행된다. 월드챔피언십은 미국 캐나다 러시아 체코 등 8개국이 겨루고, 한국은 현재 최하위 리그인 디비전4에 속해 있다. 아시안게임과 세계선수권대회를 통틀어 역대 전적은 37전 8승 29패.
김은진은 2007년 3월 영국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첫 골을 기록했다. 아이스하키는 주로 힘이 좋고 강한 선수가 수비, 날렵한 선수가 공격을 맡는다. 그는 레프트윙이다.
-아이스하키를 뒤늦게 시작했는데 어떻게 공격수가 됐죠.
"위치 선정과 패스 감각이 좋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센터포드를 하고 싶었는데 그건 경기 전체를 조율하는 자리여서 레프트윙이 됐어요. 사실 아이스하키는 워낙 경기 속도가 빨라서 포지션이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아쉬웠던 경기는.
"2008년 헝가리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린 디비전3였어요. 리그 3위였던 크로아티아를 연장까지 가서 꺾었죠. 헝가리만 잡으면 동메달 따는데, 종료 3초 남기고 골 먹어서 졌어요. 그래서 디비전4로 강등됐고요. 3초를 못 지켜서. 경기 끝나고 선수들 모두 울고, 수백 번 비디오 돌려가며 왜 졌나 연구했어요. 헝가리한테 첫 실점할 때 제가 실수를 했더군요. 지금도 생각하면 울컥해요."
-올 4월 아이슬란드 세계선수권대회가 은퇴경기였는데.
"금메달 따서 디비전3 복귀하고 유니폼 벗으려 했는데 아깝게 은메달에 그쳤어요. 아쉽지만 은퇴는 준비해온 거였어요. 스포츠도 외교라는 생각에 운동 틈틈이 영어공부를 하고, 지난해엔 여자 아이스하키 국제심판자격증을 땄고, 스포츠행정 배우려고 대한체육회 인턴생활도 했고요. 이제 운동하는 후배들 도와주는 일을 해보고 싶어요."
여자 아이스하키 국제심판자격증은 국내에서 그를 포함해 5명만 갖고 있다. 지난 2월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알마티 동계아시안게임에선 통역이 잠시 자리를 비운 북한 대표팀을 위해 감독 회의 때 통역을 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달 92대 1 경쟁을 뚫고 대한체육회 신입사원이 됐다.
"대표팀 부주장 하면서 체육회와 서류작업 같은 걸 자주 했는데 체육회에 들어가면 선수들 위한 일을 참 많이 할 수 있겠더라고요. 우리 아이스하키 선수들도 우생순처럼 올림픽 무대에 서야죠. 평창올림픽을 위해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지 않겠어요?"
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출전권은 모두 8장이다. 월드챔피언십 리그 상위 여섯 팀은 자동으로 출전권을 갖는다. 남은 2장을 놓고 1부 리그 나머지 팀과 디비전1∼4 소속 팀들이 경쟁하게 된다. 국가 간 실력차가 커 개최국이라도 자동 출전권이 없다.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 선수들이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무대에 서게 된다면, 그땐 정말 영화로 만들어야 한다.
이제훈 기자 parti98@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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