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의 약속', 이런 엄마가 세상에 있을까요?
- ‘천일의 약속’, 이런 엄마가 세상에 있을까요?
- 엔터미디어 2011.11.16
- '천일', 멜로를 넘어 인간을 담다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드라마 공감]
- "제 마음이 어머니 마음과 같습니다."
- 아들이 급하게 결혼을 서두르는 모습에 아이를 갖게 된 줄 아는 엄마 강수정(김해숙). 그래서 찾아온 그녀에게 임신이 아니라 알츠하이머임을 밝히고, 그러기 때문에 절대로 결혼 같은 건 할 수 없다 말하는 서연(수애). 강수정은 서연의 상황을 안쓰러워하고 안타까워 하지만 아들 입장에 설 수밖에 없는 자신을 용서하라고 한다. 그러자 서연은 말한다. 자기 마음이 어머니 마음과 같다고.
어찌 보면 흔하디 흔한 멜로드라마의 한 장면 같지만 이 장면이 깊은 감흥을 주는 건 왜일까. 상황은 뻔해도 그 속에 있는 두 인물, 남자의 엄마와 남자의 여자가 서로 자기 입장만 주장하고 대립하기보다는 서로를 깊게 이해하고 오히려 상대방을 배려하는 모습 때문일 게다. 강수정이 "어쩌면 그렇게 침착할 수 있냐"고 물을 정도로 차분한 모습을 보이는 서연은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하마터면 1년만 아드님을 저에게 주세요'라고 말할 뻔 했던 속내를 내레이션을 통해 털어놓는다. 이것은 강수정도 마찬가지다. 그녀 역시 안쓰러운 서연의 모습이 못내 눈에 밟힌다.
이 짧은 장면 속에는 '천일의 약속'이 하려는 이야기와 그것을 담아내는 이 드라마만의 방식이 잘 드러난다. 무모한 결혼을 하려는 아들을 반대하는 엄마가 그 아들의 여자를 찾아오는 이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의 장면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건 모든 관계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인간애'다. 아들의 여자가 아니라면 아마도 꼭 껴안아주었을 강수정과, 남자의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한 여자로서 이해를 구하고 그 넉넉한 품에 안겼을 서연. 그들은 이러한 관계 속에서 거리를 두고 머뭇거린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한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을 숨기지는 못한다. "손 한 번 잡아 봐도 돼요?" 이렇게 조심스럽게 물으며 서연의 손을 잡아주는 강수정의 모습은 그 따뜻한 마음을 드러낸다.
이것은 흔히 가족이기주의에 의해 '빗나간 모성'이 드라마의 갈등을 만들어내는 멜로드라마나 가족드라마의 틀에서 벗어난 이야기다. 이 드라마는 전형적인 멜로와 가족드라마의 틀 속에 알츠하이머라는 병을 앓게 된 한 여자(아니 한 인간)를 세워두고 이 가족들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가를 실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이제 모든 기억을 서서히 잃어버리는, 어쩌면 죽음보다 더 아픈 고통을 겪고 있는 한 인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그 인간을 위해 모든 걸 버리고 그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자식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녀를 위해 정해진 결혼마저 깨버린 자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사실 지극히 현실적인 잣대로 바라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식상할 정도로 뻔할 것이다. 타인의 고통보다는 자신의 혹은 자기 자식이 겪을 고통을 더 생각하는 것은 모든 부모들의 인지상정이 아닌가. 따라서 '천일의 약속'의 강수정 같은 엄마는 현실적인 인물은 아니다. 그녀는 최소한 모성과 인간애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으니까. 보통의 엄마들이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식을 위한 선택에는 면죄부가 성립되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그러니 이 이상적인 강수정이라는 엄마가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건,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했던 그 많은 일들에 대한 참회가 섞여있을 법도 하다.
우리는 강수정 같은 엄마를 김수현 작가의 전작인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본 적이 있다. 바로 그 작품에서 김해숙이 엄마 역할을 했던 김민재나, 그 아빠였던 양병태(김영철) 같은 인물들이다. 동성애자인 아들을 받아들이는 그 모습이 깊은 감동을 주었던 것은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일이지만,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모성과 부성으로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일의 약속'은 여기서 한 차원 더 나아가 모성애와 가족애를 넘어서는 인간애를 잡아내려 한다.
어쩌면 이것은 하나의 판타지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런 상황에서 자식이 아닌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하지만 적어도 드라마라는 판타지를 통해 우리는 그 '인간에 대한 이해'의 자세가 갖는 위대함을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제 마음이 어머니 마음과 같습니다"라고 서연이 말할 때 느껴지는 그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이해는, '결혼'이라는 지극히 통속적인 틀 따위는 벗어던진 인간 대 인간 사이에 흐르는 따스한 온기를 담고 있다. '천일의 약속'은 그래서 지금 알츠하이머라는 소재를 통해 멜로를 넘어 인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SBS 월화극 '천일의 약속'은 요즘 지형(김래원)이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서연(수애)과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생활을 해나가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지형이 양가의 인정 하에 결혼하기로 한 향기(정유미)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서연과 결혼하는 상황을 보며 시청자들도 "나도 이런 사랑 한번 해봤으면"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지형과 서연의 관계 진행은 이 드라마의 주요한 흐름이지만 서연과 지형의 모친인 강수정(김해숙)의 관계도 관심이 끌린다
드라마에서는 자식이 물질적 조건이나 스펙이 떨어지는 상대와 결혼하려 하면 부모가 대부분 반대한다. '불굴의 며느리'에서는 아들이 과부와 결혼하려 하자 엄마가 여자 집에 쳐들어와 상식 이하의 행동을 벌인다. 겉으로 보면 악녀 같지만 충분히 이해가 되는 설정이다.
그러니까 멀쩡한 아들이 치매에 걸린 여자와 결혼한다면 부모의 반응은 보나마나다. 그래서 서연 역의 수애는 처음에는 결혼하자는 김래원에게 신파 드라마를 찍고 싶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김해숙-수애의 대사는 이와는 한참 다르다. 여느 멜로드라마라면 첫만남에서 남자의 엄마는 "어딜 넘봐" 하고 여자에게 따귀를 한 대 때리든가, 돈봉투를 하나 내놓고 이쯤에서 물러가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한다.
하지만 정반대다. 결혼 며칠 전 아들이 정혼자(정유미)에게 결혼을 못하겠다고 통보한 후 다른 여자(수애)와 결혼을 서두르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엄마는 처음 수애를 만났을 때에는 결혼을 반대하는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말한다.
수애도 알츠하이머병에 걸렸음을 밝히고 "어머니 마음이 제 마음이에요"라며 절대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 수애는 돌아오는 길에 "하마터면 1년만 아드님을 저에게 주세요"라고 말할 뻔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고백한다.
김해숙은 아들이 "알츠하이머병이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줬다"고 말한 순간부터는 아들과 서연의 결혼을 조금씩 돕는다. 아들의 결혼생활이 어떻게 될지 뻔히 보이는데도 결혼을 지지해주는 엄마는 현실적인 인물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김해숙 캐릭터는 드라마에서 더욱 공고하게 다져온 '현실적 모성'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볼 여지를 제공한다. 이 말은 자식의 결혼을 반대하는 이기적 모성에 대해 반성이나 참회를 하라는 뜻은 아니다. 상투적인 멜로드라마에서 결혼에 대처하는 엄마와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이는 엄마도 이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한번쯤 생각해보자는 의미다.
김해숙과 수애의 관계에는 인간애가 깔려 있다. 통속 멜로드라마라면 악연으로 맺어질 수 있지만 김해숙은 수애와의 첫만남에서 결혼을 지지해줄 수 없다고 말하고는 "손 한번 잡아봐도 돼요?"라고 따뜻하게 말한다.
수애는 김래원과의 결혼식 전날 김해숙에게 전화를 올려 "어머님께 드린 약속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용서를 구했고, 김해숙은 "내 자식 뜻인데 어쩌겠어, 서연에게 섭섭한 마음 없어"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아들에게는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해.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 힘들어 안돼"라고 조언한다. 이런 게 판타지 같으면서도 아들의 결혼에 대한 진심어린 축복이다.
수애는 김래원에게 안겨 "사랑해, 고마워, 미안해"라고 속삭였다. 이어 "내가 지금 이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라는 내레이션이 이어졌다.
서병기 선임기자/wp@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