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사는 세상/교육 이야기

히틀러를 비판하며 크는 아이들

강물이 흘러 2009. 2. 15. 14:11

   초등학교 3학년인 작은아이 반에 수시로 친구들을 때려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이 있다. 폭력이라면 작건 크건 질겁하는 부모들의 항의가 끊이지 않아 담임과 교장까지 지금 온 학교가 곤란을 겪고 있다.

   특히 외국인에 대한 이 아이의 태도다. 한번은 터키에서 온 여자아이가 독일어 시간에 단어 하나를 틀리게 말하자, ‘야! 넌 용돈 다른 곳에 쓸 생각 말고 독일어 사전이나 사라, 이 외국인아!’라고 놀리며 때렸다고 한다. 이 말은 독일 학교에서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외국인’이라는 단어가 본래 뜻인 ‘외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외국인에게 욕을 하는 것처럼 외치는 ‘외국인’이라는 말은 사상을 의심받을 정도로 독일에서는 금기시 되는 언사다.

   얼마 전 이 문제로 그 여학생 부모와 교장을 만난 일이 있었다. 우리 아이는 워낙 조용하고 겁이 많은 성격이라 그리 크게 충돌하는 것은 아니지만, 외국인이라는 특별한 상황에 있는 우리 아이가 그런 아이와 한반에 있다는 것 자체가 걱정되어 나도 학교의 정확한 입장을 듣고 싶어서였다.

   부모에게 사건의 전말을 모두 들은 교장은 스스로도 화를 참을 수 없다며, 이미 아이의 부모와도 수차례 이야기해 보았지만 허사였고,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이 문제를 교육청으로 넘길 준비를 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독일 엄마들조차 말이 통하지 않는 다고 고개를 흔드는 그 아이의 부모는 어떤 사람일까 무척 궁금했다. 얼마 전 학부모회의에서 처음 본 그들은 독일에 사는 외국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형상을 하고 등장했다.

   빡빡 밀은 머리에 문신, 국방색 얼룩무늬가 군복을 연상케 하는 재킷에 말장화, 살기가 번득이는 매서운 눈빛과 물기 없는 까칠한 얼굴, 한눈에 그들이 ‘네오나치즘’을 표방하는 무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과격한 극우파인 이들은 외국인뿐 아니라 독일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 사회를 위협하는 암적인 존재로 악명 높다.

   둘째가 얼마 전 학교에서 돌아와서 “엄마, 히틀러는 나쁜 사람이지?”라고 물었다. “그 사람은 왜 유태인을 많이 죽였어?” 학교 수업시간에 처음으로 히틀러라는 독재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질문을 큰 아이에게서도 이 때 쯤 들었던 것 같다.

   독일학교는 초등학교 저 학년부터 자연스럽게 선생님으로부터 나치를 비판하는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독일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히틀러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을 갖게 되고, 초등학교 아이들의 대화에서도 이 독재자는 악의 화신이 되어 등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은 저학년 때부터 오늘의 독일이 어떤 바탕위에서 일어서게 되었는지 스스로의 정체성을 점검해 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과정이 우리처럼 ‘조상의 빛난 얼과 아름다운 문화유산’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가장 부끄럽게 하고 아프게 하는 잔혹한 역사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점이 다르다.

   학교에서 근 현대사를 시작할 즈음인 5,6학년이 되면 정치와 역사시간에 히틀러와 2차 대전은 빼놓을 수 없는 테마로 등장한다. 그것도 막연하게 세계대전이라는 주제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가 왜 전쟁을 일으켰고 얼마나 잔인하게 유태인들을 학살했는가에 대해 당시의 사회배경과 개인의 심리적인 문제까지, 희생자의 경험담이나 자서전 등 부교재와 함께 아주 자세하게 공부한다.

   큰 아이가 6학년 정치시간 부교제로 사용한 한스 페터 리히터(Hans Peter Richter)의 ‘그 시대의 박해 받은 자는 프리드리히였다’(Damals war es Friedlich)란 책의 내용을 보면 독일학교의 반 나치 교육이 잘 나타난다. 이 책에서 프리드리히란 나치에 의해 죽어간 주인공 소년의 이름이고, 박해 받는 유태인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이웃에 함께 살면서 같은 학교 같은 반에서 공부하던 두 소년이 있었고, 그 중 한 아이가 프리드리히, 그는 유태인이었다. 유태인이 점점 나치오날조짤리스무스(Nationalsozialismus)의 박해를 받기 시작하면서 평범한 두 소년의 운명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마침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반공호로 몸을 피하려던 프리드리히는 나치인 관리로부터 저지당해 밖에서 죽어갔고, 반공호 안에서 살아남은 친구는 폭격이 끝난 후 프리드리히의 처참한 죽음을 보게 된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다.

   자신들의 깊숙한 폐부를 과감하게 들쑤셔 놓은 이 책은 일부 진보주의 학자들의 주장을 위한 추천서가 아니라 학교의 정식 부교제로 사용하고 있는 서적이다. 일본은 둘째 치고 우리나라 사람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만일 한국인의 양심과 비도덕성을 가감 없이 드러낸 교제를 학교에서 사용하게 된다면 각계의 반응은 어떻게 나타날까. 생각만 해도 골이 지끈지끈해 질 정도로 복잡한 문제를 야기할 것이 뻔하다. 그러나 이들은 누구도 이런 종류의 교제 선택에 대해 항의하지 않는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신기할 정도로 모두 한목소리다.

   이밖에도 학교에서는 학기 중에 간간히 2차 대전 관련 영화를 상영하고 있으며, 거리상으로 허락되는 학교는 버스를 대절해서 학년 전체가 강제노동수용소를 견학하는 수업이 커리큘럼에 들어있다.

   독일어 시간에는 수많은 반전 작가들의 글을 읽고 평가한다. 또 종교와 윤리 시간에는 전쟁 때 권력에 굴복했던 교회의 행태를 고발하고, 종교의 사회책임성을 강조하며 비판하는 수업이 한 학기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시 되고 있다.

   미술은 물론 교사에 따라 다르기도 하지만 프로파간다를 위한 광고 미디어를 다룬다. 어떻게 매스미디어를 동원해서 사람들을 세뇌했는지, 이와 함께 반전포스터와 예술로 저항했던 작가들과 작품을 공부한다. 이처럼 수학이나 물리 등 순수자연과학을 제외한 대부분의 과목에서 히틀러가 등장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수업시간뿐만 아니라 학교 내에서 함부로 히틀러를 흉내 내는 몸짓이나 언행이 허락되지 않는다. 장난으로라도 나치처럼 손을 올려 인사를 했다가는 당장 교실에서 쫓겨나고, 말이나 행동이나 모습이 히틀러를 닮았다는 이야기는 아이들 사이에서 가장 심한 모욕으로 통한다. 히틀러와 비슷하게 콧수염을 기른 사람만 봐도 힐긋거리며 수군댄다.

   내가 어린 시절, 특히 남자아이들은 ‘하이 히틀러!’라고 외치며 오른손을 들어 올리는 장난을 재미있게 했던 것 같다. 지금도 아마 한국에는 재미삼아 흉내 내는 사람들이 더러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독일에서 길가다 만일 그런 짓을 한다면, 아마 갑자기 주변이 고요해지며 지나가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등골이 오싹해질 것이다. 이런 행동은 아무리 용감한 사람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장난이다.

   물론 이들의 이러한 교육정책은 유럽연합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살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몇몇 양심 있는 학자들이 아닌, 국민 모두가 한 목소리로 그들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 특히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억누르기 힘들고, 너무나 뻔뻔스러운 ‘일본!’, 그 철면피 같은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저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철저한 자기반성과 유태인과 주변국에 대한 사과를 바탕으로, 유럽연합에서 어렵게 오늘의 위치를 일구어낸 독일인의 노력을 보며, 노력은커녕 무엇을 반성해야하는지 조차도 인식 못하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아직도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원문 보기: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33477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