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부모가 되기 위하여/직장맘들의 이야기

"집안일 나몰라라"… 귀가후 손 쓰는 일은 TV리모컨 누르기뿐

강물이 흘러 2010. 1. 17. 21:06

 

"집안일 나몰라라"… 귀가후 손 쓰는 일은 TV리모컨 누르기뿐

한국일보 | 입력 2010.01.14

[워킹맘을 부탁해] 1부. 요원한 일과 가정의 양립
(4) 영원한 남의 편, 남편

"밥달라..뭐 해달라" 애처럼 보채기만..도와달라면 "너무 피곤" 변명만 늘어놔
남성 육아참여 꺼리는 사회 풍조도 문제

"남편이 하루 20분만이라도 집안 일을 도우면 얼마나 행복할까."

결혼 5년차 중학교 교사인 우현정(33)씨는 남편이 야속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정보기술(IT) 업체에 근무하는 남편은 밤 10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와서는 씻고 TV 보다가 이불 속으로 기어드는 게 일상이다.

↑ 워킹 맘에겐 때론 남편도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다. 올해는 이처럼 다정한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을까. 박상준씨가 모처럼 일찍 퇴근해 저녁 식사 후 부인의 설거지를 도와주고 있다.

 
주말에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진공청소기와 세탁기를 돌리곤 하지만 어느새 거실에 드러누워 TV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다 잠드는 경우가 다반사다.

지난달 토요일에도 그랬다. 놀토(노는 토요일)가 아니어서 밥을 지어 놓고 학교에 나갔는데 오전 늦게 일어난 남편은 10분마다 전화를 걸어 "언제 퇴근하냐"고 계속 보챘다.

무슨 일이 있는가 싶어 한걸음에 달려와 보니 남편은 네 살 난 아들을 품에 안고 소파에 삐딱하니 누워 "배고프니 어서 밥부터 먹자"고 성화였다. 우씨는 남편도, 나도 밖에서 같이 돈 버는데 너무한 것 아니냐 싶어 들어 한판 쏘아붙이려다 꾹 참았다.

그나마 주말은 좀 나은 편이다. 평일에는 모든 집안 일이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우씨는 "거의 하루 종일 서서 일하다 보니 저녁 7시쯤 퇴근하고 나면 누워서 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며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아이를 붙잡아 밥 먹이고, 책 읽어 주고, 놀아 주다 보면 온몸이 천근만근 녹초가 되지만 그제서야 퇴근하는 남편은 본체만체 하기 일쑤"라고 말했다.

남성 육아휴직 있으나 마나

남편 박상준(34)씨도 할 말은 있다. 직장이 멀어 아침 일찍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오다 보니 집안일을 돌볼 짬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육아휴직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박씨는 "이틀간 출산휴가도 상사 눈치 보다가 간신히 쓸 수 있었다"며 "아내에게 미안하지만 가족을 핑계로 일찍 퇴근했다가는 내일 당장 회사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20~40대 부부 중 맞벌이가 70%에 육박하면서 실제 맞벌이 남편의 육아휴직 신청자 수는 2007년 310명, 2008년 355명, 2009년(11월까지) 459명으로 매년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전체 대상자의 1% 남짓에 불과한 수치다.

2008년의 경우 신청자 355명 중 236명이 공무원이고 나머지 119명 가운데도 공기업 직원이 대거 포함돼 있어 민간 기업에 다니는 남편의 육아휴직 신청은 그야말로 손에 꼽을 정도다. 사실상 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얘기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시댁도 남의 편

대기업 계열사에서 근무하는 정현아(35)씨는 야근과 회식이 잦다. 두 살 난 딸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리지만 부장은 그때마다 "여자라고 예외 없다"고 공포를 조성한다.

이달 초 야근 때는 방산업체에 다니는 남편이 먼저 퇴근했다가 아이가 열이 나서 보채는 걸 보고 "그러려면 회사 그만 두라"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한바탕 다투기도 했다.

하지만 결혼하면서 구입한 서울 금호동의 30평대 아파트 원리금을 갚으려면 외벌이로는 어림도 없다. 정씨는 "일이고 뭐고 다 때려 치우고 집에 눌러앉아 아이와 놀아 주고 싶지만 마음뿐이다"고 하소연했다.

마케팅 회사에 다니는 조은미(가명·31)씨는 이혼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얼마 전 프로젝트 마감일 앞두고 야근을 하느라 남편(35)에게 세 살 난 아이를 맡긴 게 화근이었다.

저녁 7시가 넘어 남편은 "갑자기 일이 생겼다"며 막무가내로 전화를 끊었고 조씨는 일을 팽개치고 집으로 뛰어가야 했다. 남편이 술에 잔뜩 취해 들어온 건 새벽 3시.

조씨가 그간 쌓였던 감정을 터뜨리자 남편이 홧김에 던진 무선전화기가 아이 얼굴에 맞으면서 생채기가 났다. 조씨는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밤새 아이를 껴안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다가 아침에 걸려 온 시어머니의 전화에 속이 뒤집혔다. "남자가 바깥일을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조씨는 바로 친정으로 달려가 한동안 농성을 했다. "남편이고 시댁이고 다 꼴도 보기 싫더라. 왜 바둥거리며 밖에서 열심히 일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워킹 맘들은 일과 남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김광수기자 rollings@hk.co.kr
사진=박서강기자 pindroppe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