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의 약속>, 전쟁 같은 반항의 시작
텐아시아|2011.10.25
< 천일의 약속 > 3회 SBS 월-화 밤 9시 55분
서연(수애)은 자신의 삶을 살아본 적 없는 여자다. 사고사한 아버지에 이어 엄마마저 잃은 여섯 살 이후로 그녀의 삶은 온전한 빚이었다. 다른 이들의 삶을 대필하는 것이 생계수단이었고, 유일하게 욕심 낸 사랑마저 남의 것을 잠시 훔친 "도둑질"과도 같았다. 그 존재의 무의미성은 "인생 자체가 신파"인 서연에게 가장 치명적인 상처다.
지형(김래원)이 그녀와의 통화기록을 삭제한다고 말했을 때 그녀가 무섭게 화를 낸 것도 마치 자신이 삭제되는 듯한 기분을 느껴서라고 했다. 서연이 자존심을 목숨처럼 생각하는 건 그것만이 "아무것도 아닌" 자신의 존재에 대한 유일한 증명이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신세진 빚을 다 갚고 지형과의 사랑마저 청산한 뒤 벼락처럼 찾아온 기억상실은 그렇게 한 인간의 존재론적 고통을 함축하기에 그토록 무겁고 비극적이다.
어제 서연이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독백처럼 읊조린 대사들은 그러한 상황을 정확하게 표현한다. "모든 기억이 사라져가면서 나도 함께 사라져간다는 거죠. 그럼 나는 뭐가 되는 건가요. 나는 어디로 가나요. 어디서 찾을 수 있나요." 이렇듯 초반부터 서연 캐릭터의 무게가 섬세하게 직조되자 그 이후로는 그녀가 그저 거리를 걷거나, 멍하니 멈춰서거나, 조용히 앉아있거나 하는, 홀로 있는 모든 장면들에서 묵직한 고통이 전달된다.
3회 마지막 신에서 서연은 비로소 자신의 이름과 삶의 이력을 소리 내어 말하며 알츠하이머와의 싸움을 선언한다. 죽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했던 < 천일야화 > 의 세헤라자드처럼, 서연 역시 존재의 소멸에 "반항"하기 위해 이제부터 진정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 천일의 약속 > 은 신파 멜로 이전에 한 여인의 실존적 사투를 담은 비극이다.
글. 김선영(TV평론가)
'천일의약속', 김수현에 의한 수애의 모노드라마
[머니투데이 스타뉴스 하유진 기자] 2011.10.25
SBS 월화드라마 '천일의 약속'(극본 김수현 연출 정을영)의 돌풍이 무섭다. 방송 2회 만에 월화극 1위를 차지했다는 수치적인 측면뿐만이 아니다. 정통 멜로가 먹히기 힘든 안방극장에서, 그것도 알츠하이머라는 제법 해묵은 소재로 시청자들의 뇌리에 각인되고 있다는 면에서 그렇다.
'천일의 약속'의 기본 골자는 수애(이서연 역)과 김래원(박지형 역)의 사랑에 있지만, 사실상 대부분의 조명은 수애가 받고 있다. 표면적으로 박지형만이 수애를 그리워하는 캐릭터 탓도 있지만, 수애가 알츠하이머라는 전 인생을 통튼 비극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지난 24일 방송된 3회에서 수애의 모노드라마는 빛났다. 알츠하이머를 진단받은 수애가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운명에 저항하는 독백이 이어졌다. 가위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해 손가락을 가위질을 보이는 수애에게 동생 박유환(이문권 역)이 노화현상이 왔다고 핀잔을 주자, 수애는 "형광펜! 가위!"를 외치며 절규했다. 또 욕실에서 분노의 양치질을 하며 치약, 칫솔, 물컵 등의 이름을 되새겨 기억력 상실에 몸부림쳤다.
절정에 달한 장면은 거울을 마주하는 장면이었다.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해 거울 앞에선 수애는 자신의 이름과 나이 약력을 말하며 "엿 먹어라! 알츠하이머"라는 다소 극적인 대사를 호소력 짙게 소화해냈다. 수애는 이날 방송분만으로 비극에 처한 이서연을 완벽히 자기화하며 시청자들의 뇌리에 깊게 새겨졌다.
수애의 이러한 활약 뒤에는, 극적이고 비일상적인 대사조차 상황으로 풀어내는 김수현 작가의 힘이 크다. 김수현 작가는 대사만으로 자신의 드라마임을 알아채게 하는 뚜렷한 색채를 가진 작가. 문학적 비유가 섞여 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든 대사에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지만, 극 중 전체 인물을 자신의 세계 안에서 쏟아내며 각 캐릭터의 개성과 캐릭터 간 조화를 완벽히 이뤄낸다.
때문에 일각에서 '배우는 안 보이고, 김수현만 보인다'는 질타 아닌 질타도 있다. 하지만 이 점이 시청자에겐 김 작가의 드라마에 빨려들 수밖에 없는, 배우에겐 김 작가의 작품에 캐스팅되는 것을 앞 다퉈 '영광'이라고 표할 수밖에 없는 강력한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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