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조각

냄비를 닦으며...

강물이 흘러 2008. 1. 20. 15:50

 

냄비를 닦으며...

 

점심준비를 하고 식사가 끝난 뒤, 설거지를 하면서...냄비를 닦았다...

쇠수세미를 들고 박박 문질러 묵은 때를 벗겨 냈다.

스텐 압력밥솥, 냄비 두 개, 쇠로 된 중국 팬, 프라이팬,

물이 밴 도자기로 된 약탕기...그리고

싱크대, 가스렌지...

머리가 어지럽고 마음이 심란할 때면 하는 짓이다.

 

설거지를 시작하면서 작정을 했는지...

방에 가서 녹음기를 들고 와서, 거실과 연결된 문을 닫고 음악을 틀었다.

감미로우면서도 조금은 애잔한 듯한...내가 좋아하는 유익종의 목소리로,

거리에서..그리움만 쌓이네..너를 보내며..해후..내 사람이여..

들꽃...추억의 안단떼..사랑..사랑하는 그대에게..해후..등을 들으며...

 

그릇들을 박박 문질러 닦았다...언제나처럼 맨손으로...

덕분에 손톱들은 쇠수세미에 긁혀 거칠거칠해지고,

손바닥은 세제 때문에 꾸득끄득해졌지만...

 

심란하고 답답하고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

가슴이 터질 것 같아도 어디에 풀어낼 수 없을 때,

이럴 때면 잘 하는 짓들...

 

그릇이나 화장실 바닥 타일 같은 묵은 때를

솔이나 수세미로 박박 문질러 닦는다.

92년 서른의 젊은 나이에 첫서원을 하고 나간 유치원에서

화장실 바닥을 문지르던 어느 날 오후가 생각난다...

 

여름이나 봄, 가을엔 마당이나 화단에 나가,

호미를 들고 풀을 뽑거나 돌을 고르거나...

양성기 때엔 좋은 묵상 시간이었다...

풀을 뽑고, 돌을 고르면서,

내 마음에 있는 온갖 못된 생각과 욕망들을 뽑고 골라냈었다.

뿌리째 뽑지 않으면,

금방 다시 자라곤 하는 그것들을 온전히 들어내기를 기도하며...

 

어떨 때엔...책상 서랍이나, 물품 보관장, 창고 등을 몽땅 정리하기도 한다....

하나 둘씩 꺼내어 정리하다가...

어느 틈엔가 몽땅 다 들어내 놓고 정리를 하고...

책상, 옷장, 책장 밖에 없는 방에서 가구들을 옮기고 구조를 바꾸기도 한다...

 

수녀가 되기 전 같으면...머리를 자르기도 했다...

 

대학 다닐 땐, 음악감상실에 가서

헤드폰 끼고 큰 소리로 좋아하는 음악을 몇 시간이고 듣기도 했다...

집에서 깊은 밤중에 불을 꺼 놓은 채,

큰 헤드폰을 끼고, 오디오의 음량을 잔뜩 올려서...음악을 듣기도 했다...

악기 하나하나의 소리를 분해하듯 각각 들으며...생각을 잊곤 했다...

...수녀로 살면서 제일 아쉬운, 하고 싶은 일이다...

 

맑은 유리컵에 담긴 갈색의 연한 블랙커피나 푸른 녹차를,

두 손으로 감싸쥐면...

온몸으로 전해지던 온기...그 향기에 취해서......

짙은 갈색의 커피에 넣으면,

동그랗게 파문을 그리며 퍼지던 한 스푼의 프림처럼,

그렇게...마음이 따뜻해지고 풀어지곤 했었다...

 

그건...지금도 할 수 있다...

기침 때문에 잠못이루던 이후로 몇 달만에 마시는 작설차...

따뜻한 유리잔을 손에 쥐고...유익종의 노래를 다시 듣는다...

점심과 저녁 메뉴가 적힌 메모지 옆으로 펼쳐놓은

“렙소디 인 블루” 책으로나마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며 연상되는 유화 한 폭을 감상할 수 있으니...

 

그래, 행복하다고 생각하자...

                                             - 2008. 1. 20  주일 오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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