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베스트셀러 '엄마', 다음 상품은…
뉴시스 | 신동립 | 2009.09.20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는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 이야기다. 시골 어머니가 서울로 올라오지만, 도시생활에 바쁜 자녀들의 무관심 속에 지하철역에서 실종된다. 이에 아버지와 아들, 딸이 어머니를 찾아 나서며 각자 어머니에 대한 회상이 겹친다. 그러면서 '한국의 어머니'가 완성된다.
한편 영화계에서도 '한국의 어머니'가 인기다. 정기훈 감독의 데뷔작 '애자'다. 지난 주말동안 30만1818명을 끌어 모아 주말 흥행 1위를 차지했다. '국가대표' 완결판과의 관객 합산 여부 탓에 '미묘한 1위'이긴 했지만, 입소문을 타고 개봉 8일 만에 50만 관객을 돌파하게 됐다. 평일관객수도 점차 증가 추세다.
'애자'는 만년 소설가 지망생으로 살아가는 29세 처녀 '애자'와 그 어머니 '영희'와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오빠만 위하는 어머니의 태도에 반발하기도 하고, 자신도 갑갑한 삶에 지쳐 불만이 쌓여가던 중 '애자'는 어머니의 시한부 삶을 알게 된다. 거기서부터 다시 '한국의 어머니'에 대한 고찰이 시작된다.
돌아보면 이 같은 '어머니 돌아보기' 열풍은, 가장 대중이 빠르고 민감하게 소비하는 TV에서부터 시작됐다. 지난해 '국민드라마' 칭호까지 얻었던 KBS2 '엄마가 뿔났다'다. 최고시청률이 42.7%까지 나왔었다. 이쯤 되면 세대구분 없이 모두가 즐겼다는 이야기다.
왜 갑자기 대중문화계 전체에 '어머니' 붐이 일게 됐을까. 간단히만 보면, 경제불황 탓이 크다. 조선일보 9월15일자 '[오늘의 세상] 불황을 이긴 엄마의 힘'은 '엄마를 부탁해' 성공에 대해 "작가 신경숙의 높은 인지도와 작품의 완결미가 경제불황과 그로 인한 심리적 고통을 위로받고 싶어하는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것"이라는 문단의 해석을 전했다. 9월15일 SBS 8시 뉴스는 '힘든 세상, 그리운 엄마…불황기 '엄마 신드롬''이라는 꼭지에서 현재 일고 있는 현상을 '엄마 신드롬'이라 명명하며 "경기불황 등으로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가족, 특히 엄마를 통해 위안 받으려는 심리가 잔잔하게 엄마 신드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고 분석했다.
맞는 이야기다. 불황기 대중심리는 근저는 대개 그런 식이다. 가족애 코드가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왜 지금?'이냐는 것이다. 그리고 왜 '어머니'냐는 것이다. 한국의 경제 불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1997년 IMF 위기부터 생각해보면 어언 13년차다. 그 당시의 충격이 지금보다 컸으면 컸지 절대 그 이하는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당시에는 '한국의 어머니'가 팔리지 않았다. 1999년 등장한 최진실, 김혜자 주연 '마요네즈'는 철저히 무시당했다. 21세기 들어와서도 한동안 인기가 없었다. 고두심 주연 '엄마'(2005)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IMF 경제 위기가 막 닥쳤을 당시의 코드는 오히려 '아버지'였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한 집안의 가장을 다룬 김정현 소설 '아버지'가 1997년 한 해 동안만 해도 100만부가 넘게 팔려나갔다. 그 외에도 남자들은 계속해서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죽어나가거나, 굴욕 당했다. 시한부 인생을 그린 '편지'(1997), '8월의 크리스마스'(1998)가 성공을 거두고, 정리해고 당한 뒤 다른 남자에게 아내를 하룻밤 '파는' 내용의 '베사메무초'(2001)도 큰 호응을 얻었다. 이 같은 분위기는 2004년 수애, 노주현 주연 영화 '가족'까지 이어졌다.
희한한 일이긴 하다. 같은 경제 불황 코드임에도 초반 5~6년간은 '한국의 아버지'였다가, 그 열풍이 지나고 나서야 '한국의 어머니'가 떠오르게 됐다는 사실 말이다. 단순히 경제불황, 위안심리 등으로 뭉개버릴 대중심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이 같은 현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대체 뭘까.
사실상 IMF 경제 위기 즉시 '아버지' 코드가 떠오르게 된 건 십분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경제 위기는 곧 가정의 위기이고, 가정의 위기 책임은 곧 가장의 책임이 된다. 부권의 위기가 된다. 그래서 '무너져가는 아버지상' '무너져가는 남성상'이 떠올랐다. 당당하던 남성의 초라한 모습이다. 그 초라함에 느껴지는 측은감을 코드로 삼았다.
그렇다면 '한국의 어머니'는? 이 부분은 세대의 문제로 봐야한다. 한국여성의 사회의식은 386세대에서 한 번, 그리고 흔히 X세대, Y세대 등으로 불렸던 '386 이후 10년 세대'에서 또 한 번 바뀌었다. 386세대가 여성 인권과 억압적 사회제도로부터의 자유 등을 진진하게 논의하던 세대라면, 이후 세대는 실제로 이를 쟁취해낸 세대였다. 이 세대의 '어머니'에 대한 캐치프레이즈는 하나였다. "난 엄마를 사랑하지만, 엄마처럼 살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IMF 당시는 이들 '신(新)여성'들이 문화 주류소비층으로 자리 잡고 있던 때다. 이들에게 어머니 세대와의 공감대는 거의 없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극복해야 할 대상에 가까웠다. 이 세대는 어머니와의 관계 대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현대여성상을 선호했다. 1992년 '결혼이야기'부터 시작된 로맨틱 코미디 열풍은 이 같은 배경을 바탕으로 성립됐다. 이 풍조가 2002년 '싱글즈'까지 이어졌다. 소비세대에 걸맞게 30대 중심으로 이야기가 설정됐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세대가 바뀌었다. 지금 문화 주류소비층은 IMF 시기에 사춘기를 겪었거나 학창시절을 보낸 여성층이다. 그들이 사회로 나아가야 했을 때는 이미 불황의 절정기였다. 사회적 좌절감과 불만, 공포 등을 차례로 겪은 세대다. 이처럼 세대상황이 급변하면 모든 게 달라진다. 한 많고 박복한 어머니의 억압적 삶에서 자기 현실을 투영하게 된다. 어머니세대와의 공감대가 형성된다.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는 동반자다.
결국 사회분위기 상 '딸이 어머니와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10여년이 걸렸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빨랐지만, 어머니는 느렸다. 경제불황이 일찍 극복됐다면 어머니는 여전히 인기 없는 소재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한국의 어머니' 코드는 경제불황이 지속되는 한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을까? 그렇지도 않다. 현재 대중문화 콘텐츠는 20~30대 여성 타깃 구조 내에서 극단적인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뉘고 있다. 하나는 자신의 삶을 명확히 인식하며 어머니와의 유대를 만들어내는 콘셉트, 다른 하나는 아예 현실도피로 치달아 부유층의 삶을 꿈꾸게 하는 콘셉트다. 전자가 서적, 영화 등 유료 미디어에서 팔리고 있다면, 후자는 '섹스 앤 더 시티' '가십걸' 등 미드와 '꽃보다 남자' '아가씨를 부탁해' 등 한드에서 팔리고 있다. 무료 미디어 히트상품이라는 것이다. '섹스 앤 더 시티' 극장판은 예상만큼 성공하지 못했다.
거친 구분 하에서, 유료 미디어는 대개 20~30대 경제력 있는 소비층, 무료 미디어는 10~20대 경제력이 부족한 학생층 또는 문화소비에 관심이 떨어지는 중장년층으로 대상을 나눠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다가올 '경제불황 장기화 세대', 현재 10~20대 소비층은 어쩌면 자기 인식 또는 자기 연민보다 현실도피를 원하는 세대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잊고, '왕자님'을 기다리거나 '공주님'을 동경하는 세대로 거듭날 수 있다. 대중문화계 코드 지형도는 또 다시 뒤집어질 수 있다.
대중문화가 사회변화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사회변화는 상당부분 '세대교체'에 의해 발생되곤 한다. 대중문화산업의 탄탄한 기반을 위해서는 이 '세대'에 대한 연구를 보다 체계적으로 진행해볼 필요가 있다. 대중문화상품을 팔아야 할 대상은, 그대로 한 자리에 머무는 게 아니라, 컨베이어 벨트에 놓인 포장상품처럼,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고, 미끄러져 떨어지며 교체된다. 곧 다가올 컨베이어 벨트 끝의 존재가 무엇인지 미리 파악해둬야 하는 건 대중문화 전략의 기본이다.
이문원 - 대중문화평론가 fletch@empal.com
'함께 사는 세상 > 영화, 드라마, 연극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슬픔을 대물림하다, <선덕여왕>의 비담 (0) | 2009.11.16 |
---|---|
'선덕여왕' 속에 숨은 현대적 가치 (0) | 2009.09.22 |
"내사랑 내곁에", 하루를 일년처럼 여기며 죽도록 사랑하자 (0) | 2009.09.15 |
‘선덕여왕’, 오늘의 정치지도자를 논하다? (0) | 2009.09.04 |
선덕여왕의 김남길 "늘 비담스럽게"를 고민한다. (0) | 2009.08.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