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사는 세상/세상 읽기

연기·공주 현지르포

강물이 흘러 2010. 1. 13. 22:24

연기·공주 현지르포 "600년 고향 내줬더니…분하고 원통"

매일경제 | 입력 2010.01.11

◆세종시 수정안 발표◆

11일 오전 9시 40분 세종시 예정 지역인 충남 연기군 남면 양화리 마을 어귀. 이날 10시로 예정된 정운찬 국무총리의 세종시 최종 수정안 발표 TV 뉴스 속보를 지켜보고자 40여 가구 대부분 주민이 마을회관으로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세종시 발전방안' 발표가 나오자 주민들은 일제히 허탈한 반응을 보였다.

↑ 11일 충남 연기군 도로변에 걸린 세종시 수정안 찬반 플래카드를 한 행인이 바라보고 있다. 서로 다른 색깔에 상반된 내용이 적혀 있어 험로를 예고하는 듯하다. <연기/김호영 기자>

 
일부 주민은 원안이 백지화되면서 대정부 성토장을 방불케할 정도로 격앙된 반응을 드러냈다. 충남 공주가 고향인 정운찬 총리를 가리켜 '고향을 팔아 먹은 매향노' '이명박 정권의 졸개' 등 온갖 비난을 퍼붓는 목소리가 나오기까지 했다.

이 마을 이장인 임붕철 씨(57)는 "600년 대대손손 살아온 고향마을을 기껏 내줬더니…. 너무 분하고 원통하다"며 "행정중심복합도시에 다 들어 있는 내용을 무슨 새로운 것인양 행정 기능만 빼고 발표했는데 알맹이는 없는 껍데기에 불과한 안 어떤 주민이 받아들이겠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인근 월산공단 내에 경비ㆍ잡부로 취직한 주민이 겨우 두 명인데 대기업 들어온다고 우리 같은 주민들이 취직되는 것도 아니다"며 "기껏 대기업에 특혜 분양하라고 내준 땅이 아니니 다시 돌려달라는 '내땅 다시 찾기 운동'을 펼쳐 나갈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임헌서 씨(82)도 "행정도시에 삼성 같은 대기업이 온다고 하는데 법적 강제 규정이 없어 행정기관 입주 약속도 안 지켜지는데 그런 부담이 작은 기업들이 과연 들어오겠느냐"며 "우리가 언제 오라고 한 것도 아니고 강제로 하다시피했으면 법대로 추진하면 될 것이지, 이명박 정부가 '세종시 백지화'를 관철시키고 있는데 원안대로 하지 않을 거면 우리가 먹고살던 땅을 모두 원상복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옥남 씨(80) 역시 "큰일 한다는 대통령이 한 입으로 두 말하면 되느냐, 얼마나 더 속일 셈이냐, 이제는 무슨 말을 해도 안 믿는다"며 "주민들 마음은 헤아리지 않고 만날 자기들 멋대로 이랬다저랬다 하는데 넌덜머리가 난다"고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윤명근 씨(69)는 "주민 대부분이 겨우 3000만~4000만원의 보상금을 받은 상황이어서 어디 나가 살 데도 없고, 대전 서울 등에 있는 자식들에게 얹혀 사는 것도 천덕꾸러기 신세가 될 게 뻔하다"며 "무슨 기업도시 한다고 정부가 밀어붙이면 우리 주민들은 절대 안나가고 여기서 드러누울 것이다. 용산참사보다 더 큰 재앙이 일어날 수 있음을 정부는 명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업 전 110여 가구가 살다 현재 절반만 남아 있는 인근 진의리 주민들도 정부의 수정안 추진 의지에 분노를 내비쳤다.

마을 노인회장인 임완수 씨(73)는 "한다던 행정도시는 안하고 4대강 한다며 강바닥을 파내면 마을 앞을 지나는 금강은 건천이 되고 양수장은 못쓰게 돼 그나마 주민들은 현재 시세의 2%인 비싼 임차료를 내고 농사를 짓고 있지만 올해는 농사 짓기도 힘들게 됐다"며 "주민들은 언제 나가라고 할지 몰라 불안하고 주민 대부분이 갈 곳이 없는 등 이주대책이 전무한 실정"이라며 푸념했다.

팔순의 고령인 임문녀 씨는 "보상이 시작된 이후 자살하고 또 나이 많아 죽고 아마 행정도시 되기 전에 다 죽게 될 것 같다"며 "차라리 우리처럼 나이 많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안 왔으면 좋겠다"고 심정을 밝혔다.

정 국무총리의 고향마을인 충남 공주시 탄천면 덕지리도 사정은 비슷하다.

주민 김 모씨는 "처음 총리 후보자가 됐다는 말에 '마을에서 인물났다'고 잔치 분위기였는데 세종시 문제 등 충청도 사람 가슴에 못 박는 일을 왜 자처해 매향노 소리를 듣고 있는지 무척 실망스럽다"며 "뭐가 '에쿠스'인지 '쏘나타'인지도 모르고 충청인 가슴에 못 박는지, 고향 발전을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세종시 원안 사수를 위해 자주 모였던 조치원역 광장과 시외버스터미널 대합실, 시장 등을 오가는 지역민 모두 얼굴이 그리 밝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일부 주민에게서는 "공무원조차 이사오지 않는 행정도시가 지역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차라리 기업들이 들어오는 게 낫다"며 '세종시 발전 방안'을 받아들이는 목소리도 감지됐다. 정부 발표를 드러내놓고 '찬성한다'고는 못하지만 오히려 지역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주민 임 모씨(연기군 양화리)는 "행정도시에 삼성 같은 큰 기업들이 오고 과학비즈니스벨트가 들어서면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장사할 터전도 생겨 지역발전을 앞당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 Q & A… '세종시 블랙홀' 논란 있는데…

▶권태신 국무총리실장은 "세종시 입주 기업은 모두 신규 사업으로, 다른 지역에 갈 사업은 없었다"고 말했다. 4개 기업 외에 대기업을 더 이상 유치할 땅도 없다는 것이다. 용지를 싼값에 공급하는 이유도 다른 지역과 달리 용지 매각 순서를 조정(기업용 → 주택용 → 상업용)하고 최저가 낙찰제로 공사 입찰을 하는 등 사업비를 줄여서 가능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기업ㆍ대학에 적용되는 세제 혜택과 규제 완화는 다른 혁신도시와 기업도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연기ㆍ공주 = 조한필 기자]  ⓒ 매일경제 & mk.co.kr,